최근에 시간이 많아져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영화도 열심히 보고 있다. 심지어 그간 듣지 않았던 (일부러 피해왔던) 음악들도 열심히 듣고 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아무래도 그 에너지를 짜도 짜도 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 걸레짝처럼 짜내썼다가, 좀 쉬니 물기가 다시 생긴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만이 관리할 수 있는 체력적인 에너지, 정신적인 에너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는, 내 즐거움을 같이 향유할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에너지가 고갈될수도, 더 채워질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은 영화를 보면 영화를 봐도 영화 내용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물론 단순히 영화를 같이보는 영화 메이트가 없진 않았다. 그 친구는 정답을 좋아하는 친구였고, 나무위키(…)나 영화 유튜버들의 리뷰를 보고 나서야 그들의 ‘정답’을 내게 알려주며 영화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 과정이 너무 피로했다. 물론 그 친구는 각자의 의견을 나누는 것이 더 피로했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쉽게 얻는 것이 피로를 줄여주고 더 큰 재미를 준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나는 날 것의 즐거움도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영화소비 패턴이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고 그 친구와 영화보는게 재미가 없어져버렸다. 정확힌 그냥 나 혼자 보는 영화의 재미까지도 사라질 판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사귄 친구와 꽤 여러편의 영화를 보러 다니게 됐다. 이 친구는 영화도 좋아하고 여러방면에 박학해서인지 여러 관점으로 자기 의견을 얘기한다. (심지어 너무너무 내가 좋아하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고 유려하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내 이야기를 한다. (굉장히 어설프로 정리되지 않은 문장으로 뱉는다.) 그럼 이 친구는 내 문장들을 하나하나 잘 모아 내 이야기로서 들어준다. 그럼 영화를 보고 나서 100이었던 세계가 200 300씩 확장하는 기분이 든다. 내색하지 않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럼 함께 본 영화를 조금 더 오래 생각하다 잠자리에 든다. ‘영화를 봐서 정신력이나 체력을 소모했고, 나는 피곤하다’는 인상은 이미 없다.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에 다음엔 또 무슨 영화를 볼까 무슨 영화를 보고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까? 하는 생각이 지배한다. 내게 필요한 에너지를 넘칠만큼 주는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이다.

얼마전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평이 좋아서 읽고싶다고 왓챠피디아에 ‘보고싶어요’를 꾹 눌러놓았던 책이었다. 솔직히 말해 너무너무 별로였다. 작가의 연출도 별로였고 하고 싶은 메시지를 너무 일찍 눈치채버렸는데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약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별점이 꽤 높던 책이라 기대를 많이 하고 봐서 그런지 더 별로였다. 이걸 조심스레 이 책을 내게 선물해준 친구에게 말했는데, 아니, 이 친구! 나랑 같은 감상을 얘기하잖아? 나랑 답답해하는 포인트도 같고 별로라고 생각하는 포인트도 같아서 영혼의 단짝을 만난 기분이었다. (펭드비는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할 때—그 포인트가 같을 때— 진짜 사랑을 느껴요. 변태같나요) 이 날 이 친구가 같이 동조해준 덕분에, 책 읽는 즐거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 입맛이 다 같을 순 없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게 틀린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 날이었다.

나는 무슨일을 할 때 항상 ‘잘’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있는데 취미도 마찬가지이다. 못하면/잘 알지 못하면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좋아하는 데에 이유 있나요?”같은 말은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데에도 증거가 필요한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나는 증명하지 못하는 사랑은 없는 셈 치면서 산다. 그게 내 건조함의 원인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를 통해서 더이상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다만 나도 내가 원하는 그런 상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감상 표현을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은 갖게 되었다. 내 취향은 다를 뿐 틀린게 아니니까.. 내 취향의 향유 방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너무 좋아해서 골몰하고 누군가는 너무 좋아해도 건조하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많은 것들을 건조하고 조용히 얼레벌레 사랑하는 사람. 그런 내게도 함께 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친구가 생겨 기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