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분명 찌는 듯한 한여름에 모기가 많았던 기억인데, 요즘 여름엔 모기도 더운지 좀 쉬고 있다가 날이 선선해지면서 더 눈에 띄는 기분이다. 분명 피를 빨아먹고 그 뒤에 생긴 상처에 간지러움이 남는게 모기가 거슬리는 이유 중 하나일테지만, 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때 청각으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협감이 그 중 으뜸같다. 그렇게 시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물려서 아픈 것도 간지러운 것도 아니지만, 내가 관심을 주고 싶지 않을 때 내 주변을 서성이는 어떤 것의 존재는 거슬림의 감각을 쉽게 뛰어넘어 그 이상을 향한다.

나는 거슬리는 존재에 관심을 잘 주지 않는 타입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어그로에 잘 안 끌리는 편이라고 해야할까? 결코 내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하게 하고 그 일에 집중력을 다 쏟는, 그런 진중하고 정신력이 강한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후속 행동을 안 하는 쪽에 가깝다. 그냥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그렇군.”하고, 다시 제 갈길을 가는 느낌. 나는 이런 식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내게) 매우 중요했다. 이런 건조함이 내 스스로가 타인에게 최소한의 영향만을 끼치며 살아 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의 규모와 다양성이 가져오는 불안감과 책임감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마음이 내 삶의 태도를 잠식했을 땐, 나는 이미 아주 작은 호기심조차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엇이 되었든 이유가 있겠거니, 저것이 누군가의 정답이겠거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됐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친구나 애인과의 관계를 지나 업무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처음에,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나의 건조한 태도가 어떤 예의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매우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선을 넘을 수도 있는 호기심을, 애초에 갖지 않기로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꽤 괜찮은 태도였다. 그러나 이것이 친구나 애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애정어린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속으로 ‘이 이야기를 물어봐도 될까?’, ‘이 이야기를 물으면 친구나 애인이 상처받지 않을까?‘를 한참 생각한 뒤에는 이미 그 대화 주제는 지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아마 몇몇 친구들에게는 무심한 친구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삶의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건조함이 내 업무에 대한 태도까지 번졌을 때, 나는 정말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며칠전 면접을 보다가 “과제로 새로운 기술을 써보니까 어땠던 것 같아요?”같은 질문에도 대답을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어찌 되었든 개발자로서 계속 살아가고 싶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탐구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를 포기한 느낌이었다. 처음엔 그냥 나를 괴롭힐 수도 있는 작은 호기심들이 줄어든 사람이 된 줄 알았는데 이게 점점 번져 무언가를 탐구하는 마음이 자체가 사라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런 삶의 태도는 나를 더이상 “안전”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감이 생겼고, 나는 달라져야 한다.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새벽 3시의 모기와 나는 어떻게 함께 잠들 수 있었을까? 정답은 단순하다. 당장 거슬리는 날갯짓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베개로 귀를 막고 내 몸을 그녀에게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당장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귀에서 들리지 않으면 어떤 일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될까? 그렇지 않다. 댓가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그 댓가들을 온몸으로 겪어놓고 ‘생채기가 생기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아서’, ‘놔두면 잊혀지니까/사라지니까’ 등등의 핑계를 대며 외면해온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나의 호기심을 잘 조절해 나갈 수 있을까? 모기와 함께 잠드는 생활을 언젠가는 청산해야한다. 그렇다고 오늘 당장 갑자기 새벽에 전깃불을 켜고 날아다니는 모기를 죽이려는 사람이 되진 못할 것이다. 오늘 밤은 홈키파를 켜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