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소셜미디어 계정을 잠시 비활성화 했다. 비활성화를 생각하던 당시의 나는 사이버 자살에 가까운 기분이었지만 (그저 잠시 잠수를 탔을 뿐의, 자살 아닌 엄살이었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주변인들의 반응을 더해 생각해보자면 사실 실종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다. 실종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게 다들 나의 별거 아닌 일에 걱정을 할까봐 죄송스러움에 금방 다시 부활했다. (끝까지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는 뻔뻔함이 나의 과한 엄살을 방증한다.) 이유도 하찮다. 인터넷 세상 속은 모두가 열심히 사는 세상이었고 나는 그렇게 살 자신도, 아니 바라볼 용기도 없어서 그냥 그곳을 떠나기로 한 것 뿐이었다. 아마도 ‘진짜’ 내 삶에도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존재하고, 내 스스로 그것들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아주 어리석은 방법으로 반복할 사람이다. 도피성으로 죽음을 택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뒤늦게 생각하며 다시 살아나려고 아등바등 흙더미 속에서 몸을 들썩거릴 산송장이다. 사람마다 사는 것이 다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보다 못한 내 열정, 의지, 노력이 날 너무 사라지고 싶게 만든다. 저 모든 것이 온전히 내 힘으로 다 조절이 된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었지만) 그저 내가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좌절을 느끼니 나는 정말 오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오만하고 생각이 짧으니, 비록 상상에 불과하지만 죽었다 살았다 부활도 내 입맛대로 한다.

내게 있어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것 처럼, 나의 세계는 물론 당신의 세계에도 내가 없어지고 영원히 잊혀지고 싶다. 나의 증발은 지금 이런 자질구레한 사념들을 사유하고 있는 내가 세상에 남아있는 이상은 결국엔 이뤄지지 않은 것이므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상상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얼마전 내게서 사라진 카드지갑의 증발은 어떤가? 극히 허무하게 카드도 카드지갑도 일주일 안에 모두 새것으로 대체 되어 ‘나의 카드지갑’은 다시 부활했을뿐이다. The one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심지어 파괴된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눈 앞에서만 안 보일 뿐인 상태지만) ‘나의 카드지갑’이라는 존재는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은 한 것일까? 하지만 이 물음의 전제를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사라짐의 연속된 결과가 아니라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데, 나는 내심 이것이 사라진 상태의 끝없는 연속이라고 착각했다. 생각해보면 사라짐은 영원이라는 상태를 보장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라짐’을 죽음과 동치시켜 생각하기 쉬웠는데, 죽음과 사라짐은 명백히 다른 것이라 떼어놓고 생각해야했다. 부정하진 않겠다. 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사라짐을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죽음은 영원한, 완벽한​ 사라짐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어떤 관념의 존재 자체가 나(또는 누군가)의 사고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아주 어릴 적 잃었던 친구도, 가족도 나에겐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나의 영원한 증발을 바라고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육체를 잃은 ‘나’라는 사람의 관념은 다른 사람들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약속처럼, 언제를 기한으로 영원히 증발해버린다거나 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 나의 의도를 잔뜩 품은 죽음은 쓸모없는 행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영원한 무언가를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여도, 영원히 무언가를 잃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영원이라는 자체가 정말 인간이 꿈꿀 수는 있는 것인지 쉽게 상상하기 어렵고 무섭다. 기억에서 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 영원한 사라짐이라면, 어떤 기억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때 기억도 비로소 사라진 것이 되는걸까? 그것은 영원한 사라짐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영원이라는 관념을 만든 것은 인간인데 영원을 판단할 수 있는 인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태일 때의 영원도 영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영원한 건 영원하다는 관념뿐만은 아닐까?